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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이전

선사시대

우리민족이 한반도에 어떤경로로 이동하였는가는 어느 누구도 정확히 알수가 없다 . 그러나 많은 학자들에 의한 구석기 유적발굴로 구석기 시대 전기,중기,후기로 분류되는 유적과 유물이 전국 곳곳에서 발굴되어 하나하나 그문제가 풀리고 있다. 이 시대에는 뗀석기등을 사용하였으며, 불을 이용하였고 공동생활을 유지하면서 계급이 없는 평등사회를 유지하였다.

빙하기가 지나고 후빙기때에 이르러서는 신석기시대로 접어드는데 약 B.C 3000∼4000년경으로 추정된다. 그러나어떤학자들은상한을 B.C 6000년까지 올려서 보는 사람도있다.

신석기시대에는 간석기와 빗살무늬토기가 등장하였고 , 사회상은 계급사회가 아닌 혈연사회를 이룬 부족사회로 발전하게 되어 씨족공동체를 이루었다.

씨족공동체는 자급자족하는 경제적인 독립체 였으므로 씨족의 영역안에서 채집이나 사냥등 경제적인활동을 하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다 .

신석기인의 주거지는 땅을 널찍이 파서 만든 수혈주거 (움집)와 자연동굴, 인공적인 동굴로된 동굴주거가 있었다. 수혈의 크기는 대개 직경 5m, 깊이60cm, 면적은 18㎡정도로 한집에 4∼5명이 함께 기거 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신석기 말기에 북방계 청동기 문화인 즉 , 민무늬토기인들이 유입되어 새로운 주인공으로 등장하기 시작, 독자적인 문화권을 형성하게 되었다.

청동기시대 지배적인 토기인 민무늬토기인들의 거주지는 구릉지대위에 만들어진 방형의 움집이었으며 , 그주위에 나무기둥을 세워서 천막형 지붕을 씌우고 방중앙에는 방한 시설인 노(爐)를 만들어 한가족이 모두 움집에서 생활하였다.

불을 얻기도 어렵고 또 보관하거나 운반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되자 원시인들은 그들이 잡아온 불에게 이번에는 오히려 잡히는 꼴이 되고 말랐다 . 즉, 그들이 모셔온 불로부터 너무 먼 곳으로 이동할 수 없게 되고 불이있는 근처에 정착하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한민족형성의 주류는 예와 맥이며 고고학적으로 민무늬토기인의 등장에서 비롯된다 하겠다 . 우리민족의 먼 조상은 신석기 시대의 빗살무늬토기인과 청동기 시대에 민무늬토기인이 주체가 되었고, 독자적인 문화권을 이룩하였으므로 중국의 고전기록에 맥족, 예맥족, 동이족,한족등으로 불리었다.

삼국시대

삼국시대에 들어와서는 농업이 이미 기본산업으로 되었고 어업은 농업의 다음가는 산업으로 발달하였으며 수공업산업에 의한 의류산업이 이미 삼국시대부터 전하여 내려와 이 시대에 들어와서는 직조기술이 발달하였다 . 산업의 전반적인 발달을 가져온 것은 국가의 조직이 완성되고 고대신분제도가 확립되어 귀족과 관리들은 군사,정치,제례 등을 담당하고 일반평민이나 노비들은 생산을 담당하게 되므로써 가능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이 사회구성원들 사이에 계층분화가 생기고 삼국간의 잦은 전란으로 삼국시대 사람들은 대부분 도성이나 읍성에 거주하는 것이 보통이었는데 , 이것은 대개 구릉을 이용하여 축조한 것이다. 신라의 금성, 고구려의 평양성 등이 바로 도성의 예인데 처음에는 왕궁이나 관촌을 포함한 왕성뿐이었으나,후기에는 서민부락까지도 위속하는 외성을 쌓았다 한다.

이렇게 도성의 축조술이 발전되어 왕궁 , 관부, 성문등 대건축물이 서게 되고 인가는 서로 연접하여 짓게 되었는데 이로 인하여 삼국시대에 들어 와서는 화재가 사회적 재앙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통일신라시대에 들어와서는 산업이 더욱 발전하여 대외무역을 시작 하였고 도성내에서 시가를 이루어 살게 되었다.

즉 , 통일신라 시대에 전란이 그치고 사회가 안정을 찾자 왕궁, 귀족은 호화로운 생활을 하기 시작하였으며, 인구가 급증하고 불교의 융성으로 사찰이 많이 늘게되어 토지의 확장과 산업의 발전을 수반하였다.

농업에 주력한 결과 토지가 확장되고 농산물이 증가하여 사유지제도가 발전하게 되었으며 이로 인하여 부호가 발생케 되고 왕궁 , 귀족등 부호의 사치스러운 생활을 뒷받침하기 위한 의류, 금, 은, 세공품들을 수출하고 당과 일본으로 부터는 나선의복 등 사치품을 들여오는 등 대외무역이 급증하였으며 외국으로 이민까지 하게 되어 중국에는 신라방 이라는 신라인 집단거주지가 생기게 되었다.

한편 , 생산품의 교역은 상업의 발달을 가져와 대도시의 시장, 상점을 증가케 하였는데 당시 경주는 상업도시로서 번창하였다.

신라 통일전에는 경주에 시장이 한 개뿐이었던 것으로 보이나 통일후 동 , 서, 남의 세곳에 시장이 생겼고 삼국유사 1권에도 "신라 금성시대중에는 178,936호가 있었으며, 부호대가가 35개나 있었고 귀족들은 사시에따라 별장생활을 하였다"는 기록이있다.

위의 기록은 부호들의 호화로운 생활을 말하여 주는 동시에 경주가 도시의 면모를 갖추고 있음을 나타낸다 . 이렇게 도시가 번창하고 인가가 조밀함에 따라 화재가 자주 발생하였을 것으로 보이는데 삼국사기의 기록에 보면 경주의 령화사에는 문무왕2년, 6년, 8년 각각 화재가 발생하였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이시대 통치자 외에도 일반 민중들 사이에 화재에 대한 경각심이 생겼고 그결과 방화의식의 기초가 다져진 것으로 보인다.

고려시대

고려시대에는 삼국시대와 통일신라시대보다 화재가 많이 발생하였는데 이는 인구가 증가되고 대형건물이 들어선 데다가 병란이 잦은데 그 원인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

더욱이 도읍지였던 개경 (개성)은 지역이 협소하여 건물들이 밀집하였고 초옥이 대부분이어서 한번 화재가 발생하게 되면 민가·상가로 연속 확대되어 수백동씩 연소되는 경우가 많았는데 특히 이 시대에는 병화(兵火)와 왜구의 방화 약탈이 심하여 각궁전과 창고의 대형화재가 많았던 것을 볼 수 가 있다.

금화제도

실화 및 방화자에대한 처벌

관리에 대하여는 현행 면직처분에 해당하는 현임을 박탈하였으며 , 민간인이 실화로 전야를 소실하였을 때는 태(笞)50, 인가.재물을 연소한 경우에는 장(杖) 80의형을 주었고 관부·요지 및 사가·사택재물에 방화한자는 징역 3년형을 주었다.

금화관리자배치등

각 관아와 진 (鎭)은 당직자 또는 그 장이 금화 책임자였으며, 문종20년 운여창 화재 이후로 창름(쌀광)부고(,府庫)에 금화 관리자를 배치하고, 어사대가 수시점검하여 일직이궐(자리를 비거나 빠지는 일)하였을 때는 먼저 가둔후 보고하였다.

건축 및 시설개선

주택구조 등은 초가지붕을 기와지붕으로 개선토록 권장하 였으며 (개경:와가20%,초가80%) 길을 따라와 옥을 짓도록 하여 연소확대를 막았다.

창고시설은 화재를 대비하여 지하창고로 설치 하였는데 대창의 경우 20만석 이상도 저장 할 수 가 있었다. 또 한화약제조 및 사용량이 늘어남에 따라 화통도감직제를 신설하여 특별관리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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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 2010-0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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